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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와 차의 연관
(출처-한국의 차문화(우리 차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규방다례, 이귀례 저, 열화당 간, 2002년 9월))

*.이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인 이귀례(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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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의 기원

차(茶)는 언제 누가 처음으로 발견해 마셨을까. 그리고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을까. 이런 생각은 차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보았을 만하다. 차를 이용한 다양한 제품이 나오고 차문화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생각할 때, 현재 알려진 대로라면 우리나라 차문화의 오랜 역사에 감탄하게 되고, 또 너무 우연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음에 놀라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차를 처음으로 마셨다는 설은 기원전 2700년경으로 거슬러올라가게 된다. 중국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당(唐)나라 때의 문인 육우(陸羽)가 760년경에 지은 『다경(茶經)』에는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한 사람인 신농씨(神農氏)가 뜻하지 않은 과정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신농씨의 발견설과 관련해 현재까지 세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첫번째는 신농씨가 부엌에서 마실 물을 끓이고 있는데 땔감으로 사용했던 나무의 잎이 바람에 날려 뚜껑이 열린 주전자 속으로 들어갔다. 마침 그 물을 마신 황제는 향기에 홀린 나머지 그때부터 그것만 마시기를 고집했고, 이 일로 차 마시는 풍습이 널리 성행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농 시대에는 환자를 돌볼 의사가 없던 때라 몸이 아픈 사람들은 직접 약초 등을 구해 끓여 마셔야 했다. 환자 돌보는 일을 자처한 신농씨가 어느 날 큰 나무 아래에서 불을 지피고 물을 끓이고 있었는데, 그 나뭇잎이 솥 안으로 떨어져 끓이던 물이 연한 황색으로 변했다. 신농씨가 그 물을 마셔 보니 쓰고 떫었지만 뒷맛이 개운하고 해갈작용에 정신을 맑게 하여 계속 마시게 되었다고 전한다.

세번째 전설은 원시적이던 당시, 신농씨가 산천을 누비며 병자에게 좋은 약재를 구하려고 악효를 시험하던 중 백 가지 약초를 맛보고 수십 가지 독초에 중독되고 말았다. 휴식을 위해 큰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그의 앞으로 나뭇잎 몇 장이 떨어졌고, 그것을 입에 넣고 씹어 보았더니 정신이 맑아지고 기력을 되찾게 되었다. 이때부터 차에 약효가 있음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차를 즐겨 마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와 같은 내용들은 전설에 불과하며 사실로 뒷받침해 줄 만한 기록 없이 구전되는 것들이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전한(前漢) 때인 기원전 59년에 작성된 노비매매문서 『동약(憧約)』에 "차를 많이 끓여 놓으니 한데 모여서 술 마시는 것이 없어졌다"는 등 차와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한(漢)나라 때 이미 차의 재배와 제조가 이루어졌으며 차를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2. 사료로 본 우리 차의 역사

차의 기원이 그렇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으나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자생설을 비롯해,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는 "김해의 백월산(白月山)에는 죽로차(竹露茶)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씨(許黃玉)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고 전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연(一然, 906-9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바탕으로 한 수로왕비 전래설 등이 있다.

하지만 정사(正史)에 나타난 최초의 차 관련 자료는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인종 23년(1145)에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세기초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6) 때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 이 기록에는 흥덕왕(興德王) 3년(828) 중국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귀국길에 그곳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는데, 그때부터 차 마시는 풍속이 성행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신라 제35대 임금인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과 충담사(忠談師)와의 차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와 설총(薛聰)의 이야기나, 진흥왕 때 화랑들이 강릉의 한송정(寒松亭)에서 차를 마셨다는 기록10 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 기록들은 신라 사람들이 쓴 것으로 신라 중심의 사관이 개입되었을 소지가 다분하며, 차가 전래된 연대나 사실 확인이 어렵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에 먼저 차나무가 전래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당시 차나무는 중국 양자강 이남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으며 양자강 이남과의 교류는 해로를 통한 백제 쪽이 활발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한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영광 불갑사(佛甲寺)와 나주 불회사(佛會寺)를 세울 때(384) 이곳에 차나무를 심었다는 설이 있으며, 인도승 연기(緣起)가 구례 화엄사(華嚴寺)를 세울 때(544) 차씨를 지리산에 심었다는 화엄사측의 전설이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차를 전래한 나라가 중국이건 인도이건 간에, 이렇듯 다양한 우리나라의 고대 문헌에서 차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당시 왕을 비롯한 고관들의 차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과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 차문화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백제는 물론 신라에서도 일찍부터 차를 마셔 왔다. 고대국가 가운데 가장 융성한 문화를 자랑했던 백제의 차생활은 일본의 고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설에는 일본의 긴메이 천황(鈗明天皇) 시대(539-571)에 백제의 성왕(聖王, 재위 523-554)이 담혜화상(曇惠和尙) 등 열여섯 명의 스님에게 불구(佛具)와 차(茶).향(香) 등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본의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에는 백제 귀화승인 행기(行基, 668-749)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차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이 있기도 하다. 고구려는 중국 본토까지 영토를 확대하는 기상을 자랑하던 나라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일찍부터 중국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중국의 발달된 차문화를 다른 나라들보다 빠르게 전파받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고구려의 차생활은 중국과의 교류가 용이하다는 이점을 바탕으로 귀족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까지 빠르게 흡수되었는데, 이는 당시 무덤에서 여러 유물 등과 함께 발굴된 전차(錢茶)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모양이 돈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전차는 떡 모양의 병차(餠茶), 차 표면에 용 무늬 표지를 붙인 용단(龍團), 봉황 무늬의 표지를 붙인 봉단(鳳團) 등과 같이 가루를 내어 마시는 고급 단차(團茶)의 일종이다.

옛날부터 무덤에는 망자(亡者)가 평소 즐겼거나 갖고 싶어했던 것들을 함께 넣어 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차가 나온 무덤에서는 주인이 생전에 차를 몹시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차를 애용했으며 차가 비싼 물품으로서 소유하고 싶은 대상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들 삼국에서 언제부터 차를 마셨는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정확한 자료가 없어 그 연대를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무덤들의 유물과 일본 고문서 등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살펴 차 음용 시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궁중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생활에서 차를 즐겨 음용(飮用)하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을 토대로 할 때 백제인의 차생활이 신라인들보다 빨리 시작되었으며 더욱 번창했을 것이라는 유추도 하게 된다. 앞의 기록 이외에도 차나무는 식물학적으로 은행나무와 같이 고생대 지질에서 자생하는 근원식물(根源植物)인 데다 직근성(直根性) 및 심근성(深根性)이어서 옮겨 심기 어려우며, 고생대 지질이 아니면 자생하기 어려워 우리나라 토산식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차가 왕명에 의해 지리산에 심겨 음용되었다고 보고, 우리나라 전통 문화의 한 부분으로 계승 발전되어 오늘날 동호인이 삼십여만 명에 이를 정도로 각광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처음에 그 넓은 지리산 중 어느 곳에 심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고려 때 씌어진 『통도사(通度寺) 사리가사사적약록(舍利袈裟事蹟略錄)』에도 "흥덕왕 3년 당(唐)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대렴(大廉)이 차씨를 가지고 와서 왕이 지리산 장죽전(長竹田)에 심게 했다" 는 기록이 있어 『삼국사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지만, 여기서 "장죽전"이 어디인지는 확실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차의 자생지를 조사하기 위해 화엄사를 답사했던 일본인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는, 동네 주민과 스님들이 화엄사 입구 오른쪽을 "장죽전"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 일대에서 차가 자생했다는 주장이 있어, 차의 최초 재배지는 화엄사 일대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하동 쌍계사(雙磎寺) 인근이 차의 시배지(始培地)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필자를 비롯해 뜻있는 전국의 차인(茶人)들은 정성을 모아 1981년, 이곳에 "대렴공(大廉公) 차시배추모비"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매년 신차(新茶)가 나는 5월 25일을 "차의 날"로 정했으며, 매년 이날을 기해 성대한 차문화 행사가 전국에서 열리고 있다. 실제로 오래 전부터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를 거쳐 칠불암(七佛庵)에 이르는 산길 좌우에는 십육 킬로미터에 걸쳐 자생 차나무가 있었으며, 초의선사(草衣禪師)는 『동다송(東茶頌)』에서 "지리산 화개동은 차나무가 사오십 리에 걸쳐 자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차밭이 이곳보다 더 성한 곳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기록했을 정도이다. 한편, 이와 같이 여러 문헌을 통해 차나무가 우리나라에서 자생했다거나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거나 하는 말들의 신빙성에 반해, 일각에선 차가 중국에서 시작되어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사대주의적인 입장을 펴고 있지만,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것임을 밝혀 둔다.

필자는 우리나라 차문화에 대한 연구의 효율적 이용과 외국의 자료간에 비교가 쉽도록 차의 기원 관련 자료를 연대순으로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47년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99-661년 고려 문종(文宗) 때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 「기이(紀異)」편 "가락국기(駕洛國記)조에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왕(文武王)이, 즉위년(661)에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자신의 외가 쪽 시조이므로 종묘 제사를 합해서 계속 지내라고 명했다. 이에 수로왕의 17대 후손인 갱세급간(≥T世級干)이 661년부터 매년 세시(歲時)에 술을 빚고 차와 떡.밥.과일 등을 차려 수로왕묘에 제향을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540년 지리산 화엄사의 『화엄사 사적기(史蹟記)』에는 "신라의 차는 지리산에서 비롯되었다.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진흥왕 때 지리산 양지바른 곳에 절을 짓고 화엄사라 했다. 연기조사는 차씨를 가져와 절 뒤편의 긴 대밭에 함께 심었다. 그후 흥덕왕 또한 이곳에 심도록 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617-686년 고려 때의 대문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저술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원효(元曉)가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로는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 옛날에 머물던 곳이라 한다. 원효가 와서 살자 사포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했으나 샘물이 없어서 딱하던 중,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乳)과 같으므로 이로써 늘 차를 달였다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632-646년, 828년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828)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씨를 가져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이미 선덕여왕(善德女王)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81-691년 『삼국사기』에는 설총(薛聰)이 「화왕계(花王戒)」에서 신문왕(神文王)에게 "…비록 좌우에서 받들어 올리는 것들이 넉넉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며 의복이 장롱 속에 쟁여 있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좋은 약으로는 원기를 북돋우고 독한 침으로는 병독을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군왕으로서 지켜야 할 계율을 들려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692-701년 고려 중기의 학자인 이곡(李穀, 1298-1351)의 「동유기(東遊記)」에 "신라의 화랑들이 사용했던 다구(茶具)가 동해 바닷가 여러 지방에 남아 있는 것을 목격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강릉 한송정(寒松亭)에는 신라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 때 사선(四仙)이라 일컬어지던 화랑인 영랑(永郞).술랑(述郞).안상(安詳).남석(南石)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706년 『삼국유사』에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이라는 신라의 두 태자가 오대산에서 수행할 때, 매일 아침이면 우통수(于筒水)의 물을 길어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공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724-748년 일본 『동대사요록』에 "일본 덴표(天平) 연간(724-748)에 백제 스님 행기(行基)는, 일본에 귀화한 후 중생을 위해 여러 지역에 마흔아홉 개의 당사(堂舍)를 짓고 차나무를 심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들을 통해서 차가 우리의 민족사와 함께 발전해 온 역사 깊은 전통문화의 유산이며 마실거리임을 알았다. 또 우리가 일본에 차를 전해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차문화가 중국보다 먼저 시작되었다는 기록들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예로 중국 차문화의 개조(開祖)인 육우의 『다경』에 "세계 최초의 차인(茶人)은 신농씨(神農氏)" 라 했는데, 신농씨는 우리의 옛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을 일컫는 것으로, 세계 최초의 차인도 우리 민족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한다.

3. 한국 차문화사(茶文化史)

<우리 차의 개화기, 신라시대>

고려에 의해 후삼국이 통일되기까지 신라는 우리나라 정치.문화.사회의 중심을 이루었다. 아열대성인 차나무의 식물학적 특성상 북위 36도 이상에서는 생장할 수 없는 지리적 한계 때문에 경상남북도를 중심으로 번창했던 신라는 차를 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이를 근간으로 차문화가 발전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특히 불교를 국교로 했던 신라에서 사찰 중심이었던 차문화의 번성이 용이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과 귀족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폭넓게 대중적으로 차생활을 영위했다. 차가 의식용으로 쓰인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타난다.

『삼국유사』 「기이」편 "가락국기" 조에는 수로왕의 전설과 함께 가락국의 역사가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 가운데 차와 관련된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로왕 즉위 7년, 아유타국(阿踰國, 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가야의 해안에 상륙했다. 왕은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는데, 허황후는 화려한 비단이며 금.은.보석과 패물.노리개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가져왔다. 왕이 황후를 맞이한 후 어느덧 나라와 집안에는 질서가 잡혀 갔다. 왕이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므로 엄숙히 작위를 짓지 않더라도 저절로 위엄이 생겨났다. 수로왕과 허황후는 몇 년 뒤 태자 거등(居登)을 낳았다. 그러나 189년 3월 1일, 허황후가 향년 백오십칠 세로 세상을 뜨자 백성들은 비탄에 젖어 구지봉(龜旨峰) 동북쪽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왕비와 사별한 수로왕은 슬픔에 젖어 괴로워하다가 199년에 붕어(崩御)하니 향년 백오십팔 세였다. 백성들은 허황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보다 더 비통해 하며 대궐 동북방 평지에 거대한 빈궁(殯宮)을 축조하여 장사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 했다. 그리고는 그 아들 거등왕(居登王)에서부터 구대손 구형왕(仇衡王)에 이르기까지 이 묘에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을 기해 풍성하고 청결한 제전을 올렸다. 그러나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왕위와 나라를 잃게 되자 제사도 끊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삼국을 통일한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왕(文武王)이, 즉위년(661)에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자신의 외가 쪽 시조이므로 종묘 제사를 합해서 계속 지내라고 명했다. 이에 수로왕의 17대 후손인 갱세급간(≥T世級干)이 661년부터 매년 세시(歲時)에 술을 빚고 차와 떡.밥.과일 등을 차려 수로왕묘에 제향을 올렸다. 그 제일(祭日)은 거등왕이 정한 날과 같이 연중 오 일로 했다.

이 기록에 미루어 가락국에서도 차의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식과 차의 관계는 『삼국유사』의 다른 대목에서도 나타난다. 경덕왕(景德王)과 충담사(忠談師)의 만남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그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덕왕 24년(765) 삼월 삼짇날, 왕이 귀정문(歸正門)에 올라 신하에게 영복승(塋服僧)을 데려오도록 명했다. 그때 마침 한 대덕(大德)이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리고 와서 왕에게 접견시켰으나, 왕은 그 중을 물러가게 하고 다른 중을 만나기로 했다. 새로이 나타난 중은 납의(衲衣)를 입은 채 앵통(櫻筒)을 둘러메고 남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왕은 반가운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그를 문루(門樓) 위로 맞이했다. 그가 둘러멘 앵통 속을 보니 다른 것이 없고 온통 차 달이기에 필요한 기구들만 들어 있었다. 왕은 충담(忠談)인 그에게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묻자 그는 "제가 해마다 삼짇날과 중구(重九)날이면 남산 삼화령(三花嶺)에 계시는 미륵세존님께 차를 달여 드리옵는데, 지금 바로 차를 올리고 오는 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 구절을 통해 일찍이 차가 의식용(儀式用)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초의선사의 『동다송』에 인용된 중국 문헌인 『이원(異苑)』에는 섬현(剡縣)에 사는 진무(陣務)의 아내가 울안의 고총(古塚)에 제사지낸 기록을 적고 있는데, "진무의 아내는 차를 마시기 전에 반드시 옛 무덤에 차로써 제사를 올렸는데, 무덤 속의 귀신으로부터 십만 전(錢)의 보답을 받았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차가 의식용으로 쓰인 것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이지만 연도를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다만 『삼국유사』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차가 오랜 옛날부터 왕묘의 제물 목록에 포함될 만큼 값진 물건으로 여겨지고, 더 나아가 의식에서도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의식이 어떤 형태였는지, 즉 그 절차와 격식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비록 신라가 불교국가로서 승려들의 차생활이 두드러지기는 했지만, 이것은 단지 불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삼국유사』에는 "보천과 효명이라는 신라의 두 태자가 오대산에서 수행할 때, 매일 아침이면 우통수(于筒水)의 물을 길어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고 적고 있다. 또한 신라 말기의 고승 혜소(慧昭, 774-850)는 당나라에서 이십칠 년간 수도생활을 하고 돌아와 지리산 화개곡(花開谷)에 옥천사(玉泉寺)라는 절을 창건하고, 중국에서 차의 종자를 가져와서 절 주위에 심어 음용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후에 신라 제50대 왕인 정강왕(定康王)은 최치원(崔致遠)을 시켜 이 절의 이름을 쌍계사(雙磎寺)로 고치게 했다. 그리고 혜소의 시호(諡號)를 "진감국사(眞鑑國師)"로 내리면서 비(碑)를 세우게 했는데, 최치원은 임금의 명령으로 혜소의 행적을 기리는 비문을 지었다. 이 비문을 통해 당시 승려들의 차생활을 엿볼 수 있는데, 관련 구절은 다음과 같다.

"간혹 호행(胡行)이 있어 가져다 주는 향은 환(丸)으로 만들지 않고 기왓장에 얹어 잿불로 태우니, 내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마음이 경건할 뿐이다. 또한 한명(漢茗)을 공양하는 자가 있으면 가루로 만들지 않고 그대로 돌솥에 넣고 나무를 때어 삶아 마시니, 내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배를 적실 뿐이로다."

차는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하는 각성효과로 인해 선(禪)을 추구하는 승려들에게는 수도생활에 더없이 좋은 벗이 되었으며, 공양물(供養物)로 쓰였다. 신라에서는 미륵보살과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차는 향.꽃.밥 등과 함께 다섯 가지 공양물에 들어가기도 하고 향.등.꽃.과일.밥과 함께 육법공양(六法供養)에 해당하기도 했다. 승려들의 차생활 못지않게 삼국통일의 주역인 화랑들도 차를 즐겨 마셨다는 기록은 곳곳에 남아 있다. 신라 초기의 화랑으로 알려진 영랑(永郞).술랑(述郞).안상(安詳).남석(南石) 등 네 명의 국선(國仙)이 차를 즐겨 마셨음이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헌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들 화랑들이 차를 벗삼아 자연에서 풍류를 느끼고 정신을 맑게 했으며 예(禮)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고려의 이곡이 동해안 지방을 여행한 뒤에 쓴 「동유기」에는 사선들이 사용했던 다구(茶具)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대의 차는, 설총이 「화왕계」에서 신문왕에게 "비록 좌우에서 받들어 올리는 것들이 넉넉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며 의복이 장롱 속에 쟁여 있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좋은 약으로는 원기를 북돋우고 독한 침으로는 병독을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27라고 간언(諫言)했을 정도로 건강상.정신상 음용하기를 모든 이에게 권하는 최고의 음료로 손꼽혔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은 귀한 차를 받고 감사하는 글에 "선옹(禪翁)을 대접하거나 우객(羽客)께 드려야 할 선황(先皇)을 평범한 선비가 받게 되어 감사하며, 차로써 갈증을 풀 수 있고 근심을 잊게 되었습니다"라고 썼는데, 이로써 당시 차를 즐겨 마셨으며, 차가 귀한 손님에게 접대하는 음식의 하나로 여겨지면서 학자와 문인들 사이의 친분 관계에서도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 차문화의 한 단면은 각종 비문(碑文)에 나타나는 금석문자(金石文字)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 7년(546)에 세운 것으로 알려진 남원 실상사(實相寺)의 수철화상(秀徹和尙) 능가보월탑비명( X伽寶月塔碑銘)에 보이는 "茗香"이나, 앞서 설명했던 쌍계사의 진감국사(眞鑑國師) 대공탑비명(大空塔碑銘)에 나타난 "漢茗", 그리고 충남 보령의 무염국사비명(無染國師碑銘)에 적힌 "以茗" 등이 그것인데, 차는 과거 "다(茶)"뿐만 아니라 "명(茗)"으로도 자주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위에 열거된 비문 가운데 무염국사 무주(無住, 801-880)의 비문 역시 최치원이 쓴 것이다.

또 전남 장흥에 있는 보림사(寶林寺)의 보조선사(普照禪師) 창성탑비명(彰聖塔碑銘)에는 신라 제47대 왕인 헌안왕(憲安王, .-861)이 다약(茶藥)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경주 창림사지(昌林寺址)에서 출토된 와당(瓦當)에는 "茶淵院"이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씌어진 "다연원"이 어떤 일을 했던 곳인지 알 수 없지만, 차와 관계된 곳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것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차문화를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설총의 아버지이며 대스님으로 그 이름을 널리 알린 원효대사(元曉大師)이다. 그는 스스로 "스승을 모시지도 않고 배웠으며, 마음에 의지하여 저절로 깨닫는다"며 해동종(海東宗)을 창시했고, 그 과정에서 차를 공덕 수양의 방편으로 삼고자 "원효방(元曉房)"을 만들기도 했다. 고려시대의 학자로 『백운소설(白雲小說)』을 쓰기도 했던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 안에 포함된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를 통해 "원효방"을 보고 느낀 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경신년(庚申年, 1200년) 8월 20일 부령(현재의 부안) 현령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예닐곱이 원효방에 이르렀다.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어 후들후들 떨면서 찬찬히 올라가니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다. 듣건대 종종 호표(虎豹)가 인연을 구하여 올라오려다가 올라오지 못한다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로는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 옛날에 머물던 곳이라 한다. 원효가 와서 살자 사포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했으나 샘물이 없어서 딱하던 중,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乳)과 같으므로 이로써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팔 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진 누비옷에 도를 닦는 모습이 고고했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과 외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의 초상화가 있고, 외실에는 병 하나, 신 한 켤레, 찻잔〔茶瓷〕과 경(經)을 올려놓는 책상만이 있을 뿐, 불 때는 도구도 없고 시자(侍子)도 없으니 다만 소래사(蘇來寺)에 가서 하루에 한 재(齋)를 참예(參詣)할 뿐이다."

이런 문헌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삼국시대의 차문화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차가 궁중이나 사원에서 의식용으로 또는 하사품으로 쓰였음을 볼 때, 당시의 차는 귀중품으로 취급된 것이 확실하다. 덧붙여 설명하면, 차가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싸고 흔한 물건이었다면 왕이 신하에게 주는 하사품으로 쓰이지 않았을 것이며, 당시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세도가와 명망높은 학자들이 귀한 손님을 대할 때에도 차를 대접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화랑도와 차>

화랑도(花郞道)는 신라 때 청소년으로 조직되었던 민간 수양 단체로 일명, 국선도(國仙徒).풍월도(風月徒).원화도(源花徒)라고 불리기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면 화랑은 진흥왕 37년(576)에 생긴 것으로 되어 있으나, 562년에 이미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는 이때에 이르러 이전부터 있었던 미비된 상태의 화랑도를 국가조직 속에 편입시켜 무사단(武士團)의 성격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화랑도의 가장 중요한 수양방식은 도의(道義)를 닦는 것, 음악으로 심정을 고무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 병산대천(屛山大川)에서 기개와 담력을 기르고 수양하는 것이다. 화랑들의 일상생활은 신체를 단련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말 그대로 수도(修道)와 수행(修行)의 연속이었므로, 정신을 맑게 하고 생각을 깊게 하는 한 잔의 차는 수도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호식품이었을 것이다. 진흥왕 때 화랑들이 차를 마시던 곳으로 강릉의 한송정(寒松亭)이라는 곳이 있는데, 고려 중기의 학자요 시선(詩仙)인 이곡은 『가정집(稼亭集)』에서 「한송정」이란 시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마음은 오로지 승경에 있어 일찍 성문에 나서니 意專尋勝景 早出故城門 선인(仙人) 없는 한송정엔 차 끓이는 돌솥만 남았구나. 仙去松亭在 山藏石Ao存 인정은 고금이 있지만 삼라만상은 그대로이거늘 人情有今古 物象自朝昏 만일 내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를 들었을까. 不是會來此 開言謂不根

또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은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의 안축(安軸, 1287-1348)도 「한송정」이라 제한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사선(四仙)이 일찍 이곳에 모였으니 四仙曾會此 종자가 맹상군(孟嘗君) 문객만 하였다. 客似孟嘗門 구슬신 신은 분들은 구름처럼 다 가고 珠履雲無迹 푸른 수염 난 관송은 불에 타 안 남았네. 蒼官火不存 선경(仙境)을 찾으려니 푸른 숲이 그리워 尋眞思翠密 옛날을 회상하며 황혼에 서 있네. 懷古立黃昏 오로지 차 끓이던 우물만이 있어 唯有煎茶井 의연하게 돌 뿌리 옆에 그대로 남아 있다. 依然在石根

여기에서 사선(四仙)이란 신라 효소왕 때의 국선으로 영랑.술랑.남석.안상을 말한다. 『삼국유사』 「감통(感通)」편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조에 따르면 신라에도 다구 세트〔品茶一襲〕가 있었다. 가루차〔沫茶〕와 끓인 물을 융합할 때 당나라에서는 무쇠가마를 썼으나, 신라에서는 최치원의 진감국사비문에 적힌 대로 돌솥〔石釜〕을 사용했다. 야외에 다구를 휴대할 때 당나라에서는 대광주리에 담아 갔으나, 『삼국유사』 「기이」편 "경덕왕 충담사"조에 따르면 벚나무통에 담아서 둘러메고 다녔다. 당나라에서는 찻주발〔茶段〕을 썼으나 신라에서는 찻사발이 사용되었다. 이곡의 「동유기」에는 사선(四仙)이 쓰던 차부뚜막이 강릉 경포대에 있었고, 한송정에는 차샘〔茶泉〕.돌부뚜막〔石Ao〕.돌절구〔石臼〕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제현(李齊賢)의 「묘련사(妙蓮寺) 석지조기(石池Ao記)」에 따르면 순암법사(順菴法師)가 동해안에서 본 사선의 다구 유물은 묘련사에 남은 두 바윗덩이와 같다고 했다. 하나는 샘물을 담는 것이며, 또 하나는 두 군데가 오목하게 파여 있는데, 원형에는 물을 담았고, 타원형에서는 찻그릇을 씻은 듯하다.

여기에서 한송정은 강릉시 하시동 불하산(佛下山) 아래 있으며, 지금도 찻물로 이용된 돌우물〔茶泉〕과, "鍊丹石臼"라고 음각되어 있는, 차를 달이던 돌절구〔石臼〕가 남아 있다. 화랑과 차 관계를 한 가지 더 예거하면 「도솔가(兜率歌)」를 지은 월명(月明) 스님이 "신승은 다만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사온즉, 오직 향가만 알 뿐 범성(梵聲)에는 익숙치 못하옵니다"라고 경덕왕께 아뢰었으며, 왕은 월명 스님에게 차일품(茶一品)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남산 삼화령 미륵불에 헌다하고 경덕왕께도 차를 올린 충담(忠談) 스님도 화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라 차문화는 화랑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신라 차문화의 정립 연대는, 늦게 잡아도 사선의 다구가 출현하는 시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사선이 어느 시대의 화랑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 「탑상(塔像)」편 "백률사(栢栗寺)"조에 의하면, 술랑과 안상은 효소왕대(692-701)의 화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육우의 『다경』에 적힌 다구보다 앞선다. 한편 충담 스님이 메고 다닌 벚나무통을 포함한 다구들은 화랑의 산천유오(山川遊娛)에 알맞도록 고안된 야외용 다구라고 생각된다.

<활짝 핀 차문화, 고려시대>

신라의 차생활이 고려에까지 이어지면서 차를 음용하는 사람들도 여러 계층으로 늘어났다. 신라에서 왕실과 귀족.승려.문인들이 주향유층이었다면, 고려시대에는 평민들 사이에도 차를 즐겨 마시는 풍습이 성했고, 국가의식은 물론 백성들의 제사의식에도 차가 빠지지 않았다. 국가의식에는 반드시 "진다의식(進茶儀式)"이 행해졌는데, 여기서 "진다(進茶)"란 술과 과일을 임금께 올리기 전에 임금이 먼저 차를 청하면 신하가 차를 올리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고려시대 궁중의식차(宮中儀式茶)의 표본이라 할 수 있으며, 진다의식은 이때 행하는 제반의식을 말한다. 고려 때 왕이 행하는 별도의 의식으로서 다례가 행해졌다는 것은, 차가 진상(進上)하는 중요 음식으로서 자리잡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와 함께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가 궁중에서 행해지는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이때에도 진다의식은 반드시 거행됐다. 이 의례(儀禮)를 주관한 관청이 바로 "다방(茶房)"이었다. 연등회는 정월 보름에 불을 켜고 부처님에게 복을 빌며 노는 민속의식으로서, 고려 태조(太祖) 때부터는 백성들을 위해 나라에서 해마다 열었고, 그 뒤에 나라의 풍속이 되어 시골에서도 이 모임을 열었다. 팔관회는 오래 전부터 시조의 묘에 제사하던 풍속이 고려시대에 불교가 번창함에 따라 불교의식을 가미한 토속신을 위한 제사행위로 변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제6대 임금인 성종(成宗, 재위 982-997)은 직접 단차(團茶)를 맷돌에 갈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최승로(崔承老, 927-989)가 올린 개혁안 「시무이십팔조(時務二十八條)」에 나타난다. 최승로는 일종의 서정쇄신책(庶政刷新策)으로 성종 원년(982)에 이 안을 올렸는데, 그는 두번째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가만히 살펴 듣건대 성상(聖上)께서 공덕재(功德齋)를 세우시고 혹 몸소 차를 맷돌에 갈고, 혹은 친히 보리도 간다 하온즉, 신은 성체(聖體)의 근로하심을 심히 근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폐단은 광종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 있듯이 왕이 손수 단차를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놀라운 일이며, 광종(光宗, 재위 949-975)은 고려의 제4대 임금으로 이미 고려시대 초기부터 차가 왕실의 귀중품으로 쓰였음을 잘 나타내 주는 문구이다. 한편 『고려사』에 기록된 연등회 관련 내용을 보면 진다의식이 얼마나 까다롭고 엄격했는가를 알 수 있다.

"임금이 먼저 차를 올리라고 명하시면 시신(侍臣)이 나아간다. 이때 집례관은 임금을 향해 국궁 재배(再拜)하며 차를 올린다. 어주(御酒)와 수라를 올릴 때에도 역시 집례관이 국궁 재배하며 권한다. 이때 임금께서 반드시 태자(太子) 이하 시신제관(侍臣諸官)에게 차를 하사한다. 이렇게 태자 이하 시신들에게 이르면 집례관이 배례(拜禮)를 청한다. 그러면 태자 이하 모두는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며 재배를 드린다. 그리고 집례관의 집전에 따라 태자 이하 시신들이 읍(揖)하고 선다."

이는 『고려사』 "상원연등회의(上元燃燈會議)"조에 나타난 연등대회일의 진다의식으로, 팔관회 때도 비슷한 의식이 치러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팔관회 때에는 차 이외에 다식(茶食)이 곁들여졌다고 전한다. 앞서 밝힌 것과 같이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 연등회와 팔관회는 연중 가장 화려한 대제전(大祭典)이었다. 이 행사 때에는 헌화(獻花).주악(奏樂).무도(舞蹈) 등 온갖 연희(演戱)가 베풀어졌고, 삼경유수(三京留守)와 동서병마사(東西兵馬使).팔목사도호(八牧四都護) 등 전국의 최고 관리들이 모두 참석해야 할 정도로 중대한 국가 행사였다. 더욱이 겨울에 열리는 팔관대회일에는 송상(宋商)은 물론 여진(女眞)과 탐라(耽羅)에서도 축하 사절이 모여들었고, 행사 며칠 전부터 장안은 온통 전국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 팔관회 의식은 신라 진흥왕 12년(551)부터 시작되어 고려의 마지막 왕인 제34대 공양왕(恭讓王) 4년(1392)까지 계속되었는데, 삼국시대 후기 및 고려시대의 차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은 신라의 전통과 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으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즉위 원년에 팔관회를 베풀도록 했는데, 『삼국사기』는 팔관회가 신라 진흥왕 때 비롯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조는 그의 「훈요십조(訓要十條)」 중에도 팔관회와 연등회의 중요성을 언급, 국가의 두 큰 의식으로 거행하도록 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이 두 행사를 베풀 때 모두 차를 이용했다.

원래 2월에 행하던 것을 의종(毅宗) 때부터 정월 보름에 행하게 된 연등회는, 겨울철에 왕도(王都)에서만 행해진 팔관회와는 달리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거행된 불교행사였다. 연등회 때 진다(進茶)가 있었는데, 진다는 임금이 차를 명하면 옆의 신하가 차를 먼저 올리는 것을 말한다. 『고려사』 "연등회"조를 보면 진다의 자세한 절차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궁중에 "다감(茶鑑)"이란 관청도 생겼으며, 임금은 신하가 죽었을 때 차를 하사하기도 했다. 또 이 글을 보면 여든아홉 가지 의식 가운데 차를 내어야 하는 의식이 무려 열한 가지나 된다.

길례(吉禮)로서 원자의 탄생 축하 의식, 왕태자의 책봉 의식, 왕자비의 책봉 의식, 공주의 탄생 축하 의식, 공주의 결혼식에 진다의식이 거행되었다. 가례(嘉禮)로서 명절인 음력 11월 14-15일의 팔관회와 2월 15일의 연등회, 원정(元正).동지의 조하(朝賀) 의식, 대관전(大觀殿)의 군신 연회에 다례가 있었다. 빈례(賓禮)로서 노인의 사연(賜宴) 의식, 북조(北朝) 사신의 영접 의식에 다례를 행했다. 흉례(凶禮)에는 엄중한 처벌에 대해 임금께 대답하는 말씀을 여쭙는 의식인 중형주대의(重刑奏對儀) 때에도 진다의식이 있었다. 또한 고려시대 차문화를 이해하는 데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자료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마흔 권이 있다.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파견한 고려 국신사(國信使) 일행 중 제할인선체물관(提轄人船體物官)으로 고려 송도(松都)에 다녀간 서긍(徐兢)은, 한 달 동안 고려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것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무릇 연회 때면 뜰 가운데 차(茶)를 끓여서 은쟁반으로 덮어 가지고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다. 그리고 찬자(贊者, 알리는 사람)가 "차를 다 돌렸소" 하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으므로, 으레 냉차(冷茶)를 마시기 마련이다."

또 서긍이 어느 관리로부터 초대받아 갔을 때의 모습도 기록되어 있다.
"일행이 열을 지어 앉은 다음 주인의 아들이 다과(茶菓)를 올렸고, 예쁜 젊은이가 찻잔을 돌려 놓고 왼손에 다관을 들고 오른손에는 차선(茶Ag)을 들었다. 윗자리부터 차를 따르고 아랫자리에 이르는 동안 조심하여 난잡함이 없었다." 일반 가정에서 손님이 왔을 때 차를 대접하는 모습이다. 아마 이때 사용했던 차는 가루차〔沫茶〕인 듯하다. 또한 서긍이 길을 가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차를 마시고 가라"고 하여, 일반 서민사회에서도 차를 많이 마시는 습속이 있었음을 술회하고 있다. 이 외에도 궁중의식 가운데 왕이 신(神)이나 부처에게 재(齋)를 올릴 때도 차가 쓰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차가 쓰인 것은 이 두 행사뿐만이 아니었다. 여타의 큰 의식이 있을 때에도 진다가 행해졌는데, 왕자나 왕비(王妃)의 책봉, 공주하가의(公主下嫁儀), 외국 사신의 영접 때에도 진다의식이 베풀어졌다. 대개 왕자나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은 대관전의 진설(陳設, 음식 차리기), 등책(藤策), 궁정수책, 회빈(會賓)의 순서로 이어졌는데, 이때 진다는 회빈에 포함되어 있었다.

"책봉의식에 참석한 책사(策士).도호부사(都護府使).독책관(讀冊官)에게는 과일상이 베풀어지고, 먼저 집례관이 주인을 인도하여 문 밖 왼쪽으로 나아가 서향(西向)하고 서게 한다. 그런 다음 집례관이 손님을 안내하여 문 밖 우측으로 나아가 동향(東向)으로 서도록 한다. 주인과 손님이 마주 서서 읍례하고 문으로 들어가 마루 위에 선다. 쌍방이 모두 자기 위치에 서게 되면 집례관이 기거장(起居狀)을 교환토록 한다. 기거장은 일상생활을 기록한 일종의 문서로서, 이를 교환하고 나면 손님과 주인이 모두 재배하고 걸어 나온다. 그런 뒤 재차 재배를 마치면 제각기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다. 이때 집례관이 찬인(贊引) 이하 행사 집례관의 기거장을 받아 주인에게 드린다. 그리고 나서 찬인 이하가 앞으로 나아가 알현(謁見)을 마치고 나온다. 집례관의 찬읍(贊揖, 읍례의 구령)으로 손님과 주인이 서로 읍례하고 차를 올린다."

이것은 왕자 및 왕비 책봉의식이지만 왕자나 공주가 탄생했을 때, 군신들이 모여서 회의를 할 때, 중신(重臣)이 죽었을 때에도 왕이 차를 내렸다. 『고려사』에 따르면 최지몽(崔知夢).최량(崔亮).최승로(崔承老) 등이 죽었을 때 왕이 뇌원차(腦原茶) 또는 대차(大茶)를 내렸다고 한다. 또한 왕이 죄인에게 참형을 결정하기 전에 신하들과 차를 마시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보다 공정하고 신중한 판결을 내리도록 노력했다.33 정월 초하룻날 대궐에서 조회를 할 때의 의식인 "원회의(元會儀)"와 궁중의 연회 때에도 신하가 왕에게 차를 올리고 신하들은 왕이 하사한 차를 마셨다.

관청에서도 차 마시는 풍습이 있어, 사헌부(司憲府)에서는 날마다 한 번씩 차를 마시는 "다시(茶時)"를 가지면서 공정한 판결을 위해 노력했다.35 이때 차의 역할은 의식적인 측면을 떠나, 차 마시는 예절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각성 효과 등의 약리적 효과를 누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차는 사신을 맞거나 보낼 때 등 중요한 국제외교 관계가 있을 때도 예물로 사용되었다. 송(宋)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예물 중에 용봉차(龍鳳茶)가 있었고, 고려가 원나라에 예물을 보낼 때도 향차(香茶) 등을 넣어 보냈다고 한다.36 고려에서는 또 중국 왕의 조칙(詔勅)을 가져온 사신에게는 진다의식을 갖추어 대접함으로써 품격을 높이려 했으며, 조칙을 갖고 오지 않은 사신에게는 간단하게 차를 베풀고 인사를 한 후 객관으로 안내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궁중의 대소사(大小事)와 외교 관계 등 각종 행사에 차가 빠짐없이 쓰이고 그 횟수도 빈번해지자, 고려에는 차에 관한 일을 전담하는 "다방(茶房)"이라는 관청이 생겨났다. 이곳엔 의약과 치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태의감(太醫監)이 소속되어 있었고,38 또한 궁중 밖에서 왕족에게 차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일을 위해 다구(茶具)와 각종 행사 물품을 전담해 나르는 차군사(茶軍士)가 배치되기도 했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궁중뿐만 아니라 각 사원(寺院)에서조차 차의 쓰임새가 더욱 많아져 다방만으로는 그 업무를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차를 재배하고 제다(製茶)까지 해 사원에 공급하는 부락인 "다촌(茶村)"이 생겨나기에 이른다. 고려시대에 씌어진 『통도사 사리가사사적약록』에 따르면 "통도사 북쪽 동을산(冬乙山)에 다촌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동을산은 오늘날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에 있는 영취산(靈鷲山)으로, 이 마을에는 다전(茶田)과 다천(茶泉)이 남아 있어 후세에 "다소촌(茶所村)"이라 불렸다. 다방과 다촌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정확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일설에 의하면 고려 정종(定宗, 재위 946-949) 때의 일이며, 동을산 북쪽에 있었다는 다촌의 위치는 현재 울산 울주군 언양읍 부근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도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귀족과 문인.학자들이 차를 즐겨 마셨는데, 초기에는 주로 귀족 중심으로 차문화가 번성했지만, 중기부터는 문인과 학자들이 차문화를 꽃피우는 주역을 담당했다. 이들은 직접 차를 끓이며 무아의 경지를 맛보고, 차를 마시며 선(禪)을 행하고 도(道)에 이르렀다. 서로 약속하여 찻자리를 마련했고, 때로는 초대장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의 문인들은 정자나 재실.초당에서 손쉽게 차를 끓여 마셨다. 분위기 좋게 정원을 가꾸고 다구(茶具)의 쓰임과 모양에도 신경을 써 고려청자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이런 곳들에서 아직도 많은 고려청자 다구가 출토되는 것을 보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왕실과 귀족의 보호 아래 차문화가 매우 융성했다. 승려들은 수행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차를 즐겨 마셨으며, 연등회나 재를 올릴 때, 고승의 제사 때에도 차를 올렸다. 사원에서는 차 끓이기를 서로 겨루는 "명전(茗戰)"이라는 풍속이 행해졌다. 일반 평민들은 차를 파는 가게인 "다점(茶店)"에서 돈과 물건을 차로 바꾸어 사 마셨다. 고려시대 일반인들의 차생활은 그리 용이하지만은 않았다. 고급 차를 즐기는 사치 풍조와 과중하게 부과되는 "세차(稅茶)" 때문에 일반 서민들에게 차는 더 이상 생활 속에 함께할 수 없는 사치스러운, 원한의 대상으로 변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차나무를 아예 뽑아 버리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차문화가 퇴색하는 이유가 되었다.

고려시대 차문화를 대변할 수 있는 인물로는 백운산인(白雲山人)이란 호로 잘 알려진 대문장가 이규보(李奎報)와,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충절을 대표하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등이 있다. 또 고종(高宗) 때의 진각국사(眞覺國師, 1178-1234) 등도 수도생활에 차를 가까이했다는 기록을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비정신과 차의 만남,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고, 그 여파로 사찰 중심의 차문화도 고려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하지만 왕실이나 사대부 등을 중심으로 한 선비.귀족 계층에서의 차생활은 여전히 계속 성행했다.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초기부터 왕실행사에서 차가 의례(儀禮)의 대부분에서 쓰였던 것이 점차 줄어들고, 차 대신 술이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왕실에서의 관례적인 차의식은 계속되었고, 그 의식은 고려보다 더 엄격하고 격식화했다. 궁중에서 치르는 모든 제사에는 다례가 포함되었다. 궁중다례는 고려 때 생긴 다방(茶房)에서 관장했는데, 이 조직은 고려시대와는 달리 이조(吏曹)의 감독 아래 내시원(內侍院)에 소속되어 있었다. 말엽에는 다방 외에도 내국(內局)에는 주원(廚院), 사옹원(司饔院)에는 다색(茶色).봉상시(奉常寺), 혜민국(惠民局)에는 차모(茶母)를 두는 등 각 기관별로 별도의 다례나 차 소비를 맡아보는 관비(官婢)를 두기도 했다.

다방에서는 급도지법(給到之法)에 따라 임금의 강무(講武)에 수행하여 임금에게는 하루에 세 차례, 그 밖의 수행관에게는 한 차례씩 차를 바치는 일을 했다. 사옹원에서는 대전.왕비전.세자전.혜경궁에 다색장리(茶色掌吏) 두 명씩을 파견하여 공상법(供上法)에 따른 차 백여덟 말 여섯 되씩을 달여 바쳤다. 사헌부의 관원들도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매일 한 차례씩 차를 마시는 "다시(茶時)"를 통해 공정한 판결을 위한 토론의 자리를 마련했으며, 사헌부뿐만 아니라 일반 관아에서도 일정 시간을 정해 놓고 관료들이 차를 마시며 행정을 논했다.

조선시대에도 외교 관계에는 차의식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압록강 연안의 국경에서부터 수도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번에 걸쳐 다례의식이 행해졌다. 사옹원에서는 중국 사신을 영송하는 빈례인 평안도 의주의 용만관(龍灣館)에서 베푸는 용만 연향(宴享)과 서울의 태평관(太平館)에서 거행되는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 궁중에서 거행되는 인정전(仁政殿) 접견 다례, 편전 접견 다례 등을 받들었다.

일본에서 사신이 올 때도 다례의식이 치러졌다. 일본 사신을 영송하는 다례를 위해 사역원에서는 다례강좌.다례문답.강정다례장(講定茶禮狀)을 일본 글과 말로 가르쳤고, 하선다례(下船茶禮)와 연향의식의 다례는 동래부사(東萊府事)가 집례했다. 단종(端宗) 2년(1454) 정인지(鄭麟趾, 1396-1478) 등에 의해 편찬된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빈례의식(賓禮儀式)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40에 대한 내용을 보면 그 의식이 매우 복잡하여 의식지향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이십오 대, 사백칠십이 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으로 정리한 귀중한 자료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중 "태조(太祖) 원년 2월 계묘"조를 보면, "왕이 태평관(太平館)에 나아가 명(明)나라 사신과 다례를 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세종(재위 1419-1450) 때에는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에서 왕이 사신 윤봉(尹鳳)과 다례를 행했으며, 대사성(大司成) 정인지 등도 명륜당(明倫堂)에서 다례를 행한 사실이 서술되고 있어, 사신을 맞는 데 왕과 사신이 별도로 다례를 실시할 정도로 다례는 외교 관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음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이 명륜당에서 유생들과 함께 다례를 행한 일이 있고, 그 뒤로도 연산군(재위 1495-1506) 10년에는 효사묘(孝思廟)에서도 이와 같은 다례가 베풀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와 문인들의 차생활의 특징은, 예를 중시했지만 사치풍조가 심했던 후기 고려시대와는 구별되며, 승려들은 차를 수행의 도구로 생활에 가까이했으며 부처님 공양이나 스님의 제사 때에도 차를 올렸다. 이러한 기록들은 반복적으로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는데, 조선시대의 차문화에서 특기할 사실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다례가 서민층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차가 생산되는 지방의 민간에서는 차가 약으로도 쓰여 시장에서 물물교환되었고, 차만 팔고 다니는 차약장사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고려시대에 비해 여러 의식에서 불교적 색채가 퇴화하는 반면 점차 유교적 성향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말에 들어온 주자학(朱子學)에 기인한 것으로, 민간에서도 이른바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의한 관혼상제(冠婚喪祭) 의식이 토착화했는데, 이 네 가지 예〔四禮〕를 행할 때에는 으레 차가 사용되었다. 사례(四禮) 가운데 관례(冠禮)는 오늘날의 성년식(成年式)을 뜻하며, 보통 혼례(婚禮) 직전에 행한다. 미성년자는 관례를 행함으로써 비로소 성년이 되었다. 이런 의식은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발달했다. 관례는 관자(冠者, 성년이 되는 사람)가 조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 나아가 배례(拜禮)하면서 다례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또 혼례는 인륜(人倫)의 대사(大事)라 하여 어떤 예속(禮俗)보다도 신성하게 여겼다. 조선시대의 혼인 풍습에는 납채(納采)라는 의식이 있었다. 신랑집에서 결혼할 남자의 성명과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 즉 사주단자(四柱單子)를 신부집으로 보내면, 신부집에서는 궁합을 본 후 길일을 택해 다시 신랑집으로 납채를 보냈다. 이때 주인 부부가 사랑채에서 다례를 올린다. 가례(家禮)에 의하면, 주인과 손님이 함께 다례를 행하기도 했다.

또한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내는 예물인 납폐(納幣)에는 혼인을 확정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런데 이 납폐를 보낼 때에는 봉차(封茶)라 하여 차와 차 씨앗을 봉해 넣는 풍습이 있었다. 지방에 따라 이를 "봉채" 또는 "봉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때 학자 이재(李縡, 1680-1746)가 관혼상제의 제도 및 절차에 관한 요점을 가려 편찬한 『사례편람(四禮便覽)』에 따르면, "납폐를 맞는 친영(親迎)의 의식으로 신랑집 주인 부부는 아들이 혼인케 됨을 사당에 고하고 제사를 올린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혼인이 이루어지면 묘현(廟見)의 예를 행한다. 묘현이란 여자가 시집가서 처음으로 시집의 사당에 배례하는 것을 말한다. 신부는 또 결혼 사흘 만에 시가(媤家)의 선영(先塋)을 배알하고 친가에서 준비해 간 다과.다식 등으로 다례를 올렸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유교적 민간의식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인데, 상례는 누군가가 죽었을 때 고인에 대한 예의로 행해졌다. 그러나 제례는 조상을 모시는 대표적 의식으로 시제(時祭).속절제(俗節祭).기제(忌祭)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제사에서는, 『삼국유사』 「기이」편 "가락국기"조에도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청결한 제물과 차로써 조상에 대한 예를 표하려 했다. 흔히 속절제를 일컬어 "차례" 혹은 "차례 지낸다"고 하는데, 이는 곧 오랜 세월을 두고 차가 제수로 쓰였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성현(成俔, 1439-1504)은, 고려로부터 조선 성종 때에 이르기까지 형성 변화된 민간 풍속이나 문물제도.문화.역사.지리.학문.종교.문학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다룬 『용재총화(ªV齋叢話)』에서 제사에 차가 여러 가지 과일과 떡.탕 등과 함께 사용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차생활은 고려 말엽부터 나타난 각종 폐해로 일반 백성들에게 외면당해, 조선 중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기점으로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주자학이 정치이념으로 대두되고 불교가 쇠퇴했으며, 차를 가장 많이 소비했던 사원의 재정 악화는 차의 증산에도 영향을 주었고, 사찰들도 산 속으로 쫓겨나게 되어 사찰과 평민들 간의 교류가 감소되어 차 인구도 점차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시대의 폐습으로 차 생산지에 강요되는 많은 세금과 고급 차만을 선호하는 풍조가 조선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심지어 백성들은 물론 문인과 승려들까지 높은 세금으로 인해 차를 숨겨 놓고 마시기까지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차생활 쇠퇴의 가장 큰 이유는, 임진왜란 이후에는 차를 즐겨 마시며 공양물로 차를 애용했던 사원에서까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차를 냉수로 대신할 정도로 국가와 사원.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워져 차를 계속해서 마실 수 없게 됐다는 데 있다. 이렇게 차문화의 명맥이 끊어져 가던 중에도 남쪽 지방의 사원에서는 일부 승려들 사이에서 차 마시는 풍습이 계속되었으며, 이는 19세기 들어 다시 차가 성행하게 되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이 당시 차를 중흥시킨 인물로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김정희(金正喜, 1786-1856) 등을 들 수 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중에 차를 즐기기 시작해 "차를 마시는 백성들은 흥하고, 술을 마시는 백성은 망한다(飮茶興 飮酒亡)"고 하면서, 스스로 호를 "다산(茶山)"이라 칭하고 차와 관련된 많은 명시(名詩)를 남겼다. 그는 유배지를 떠나기에 앞서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기도 했다. 다신계는 1988년 필자를 비롯한 전국의 차인들에 의해 다시 설립되었는데, 설립 초기 다신계 절목을 근거로 규약을 만들기도 했다. 이 다신계가 현 한국차문화협회(韓國茶文化協會)의 모태가 되었다.

정약용에게 경서(經書)를 배운 초의선사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도 통달해 당시의 석학들과 교류했으며, 차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차문화의 교과서와도 같은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지어, 우리 차문화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한편 차문화 정립에 일조했다. 초의선사와 많은 논쟁을 벌였던 김정희 역시 유배생활을 차로 달래면서 심취한 후 차에 관한 많은 시와 일화를 남겨, 척박하던 조선시대 차문화 부흥에 큰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은 도공 납치의 다기(茶器) 전쟁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을 일으키던 당시의 일본 사회는 다도(茶道)가 성행되던 시대로서, 이를 대성시킨 센노 리큐(千利休, 1522-1591)가 활약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특히 도요토미는 나고야(名古屋)의 진중(陣中)에서도 차 모임〔茶會〕을 베풀면서 차를 즐기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찻잔은 중국과 조선에 의존하고 있었다. 조선 침략에 참전한 대부분의 제후들은 다도를 수련했는데, 일본의 국토가 협소하여 전승한 군인들에게 토지 대신에 다구(茶具)로 포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도공 납치와 도자기 수탈로 인해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른다. 당시 납치된 천여 명의 도공 후예들은 현재까지 일본의 도예계를 이끌어 가는 주축이 되고 있으며, 지금도 "임란 도공 육가문(六家門)"이란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당시 납치된 대표적인 도공들 가운데 바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리타야키(有田燒)의 시조인 이삼평(李參平)이 있었으며, 사쓰마야키(薩摩燒)로 알려진 심수관(沈壽官)의 선조와 동료들도 같은 경우였다. 이삼평은 아리타(有田)에서 백자의 원료가 되는 흙을 발견했는데, 이를 사용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를 빚었다. 이를 계기로 이삼평은 지금도 일본에서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다.

전국시대에는 찻단지 한 개와 성(城) 하나를 동격으로 여기던 장군도 있었다. 그래서 장군들이 조선의 도자기에 대해 탐을 내기도 했거니와, 도공을 납치하라는 주인장(朱印狀)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정유재란에 참전한 제후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도공을 조선에서 잡아갔다. 납치된 도공들에 의해 도자기 문화의 꽃이 핀 일본에는 지금도 조선의 도예 용어가 전승,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암흑기를 거쳐 다시 부흥으로, 근.현대>

19세기에 들어와 차 마시는 여건이 새로 조성되면서 음다(飮茶) 풍습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계층에서만 차를 마셔 일반화하지는 못했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차문화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나라가 외세에 의해 침략당하고 어수선해진 데다가, 민생이 피폐해지면서 차를 마시는 여유보다는 나라를 걱정하고 당장 내일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일부 승려들이 산사(山寺)에서 차를 마셨다. 차의 식물학적 특성상 남부지방에 국한되었던 차 생산은 소비 감소 등으로 인해 인기가 떨어지게 되었고, 남해안 지방, 특히 장성(長城).보성(寶城).광양(光陽).하동(河東).해남(海南).강진(康津) 등지에서 일부 농민들만이 차를 생산했을 뿐이었다.

한편 일제 치하에서도 장흥 보림사(寶林寺) 일대에서는 단차(團茶)가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차는 육이오 이전까지 시장에서 팔렸으나 언제부터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상황을 나타내는 여러 문서들을 종합해 볼 때, 이곳에서 만들어진 단차는 육우(陸羽) 시대의 제다법(製茶法)과 매우 흡사해 주목을 끌었을 것으로 본다. 일본의 차 상품 가운데 "맛차"가 있는데, 이는 분말 잎차를 큰 나무사발에 타서 거품을 내 보약처럼 마시는 것이다. 이 또한 다른 음다 풍습처럼 한국 행각승(行脚僧)의 풍습이 일본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을 걸망에 담고 돌아다녀야 하는 행각승들은 걸망 무게를 줄이기 위해 차를 가루 내어 지녔을 것이고, 한적한 곳에서 승려들의 밥그릇인 바리때에 냇물 등을 떠, 준비해 두었던 찻가루를 풀어 마시면서 여독을 풀곤 했을 것이다.

1940년 일본인 모로오카 다모스(諸岡存)와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가 공동 저술한 『조선의 차(茶)와 선(禪)』이라는 책에서는 "조선 사람들은 자기 땅에 좋은 차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조선의 차를 개척하여 다업국책(茶業國策)의 실(實)을 거두어야 한다"41고 기술했다. 우리나라의 차가 일본의 것보다 우수했고, 나아가 경제적 가치가 높았음을 그들도 인식했던 것이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차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전통문화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혹은 건강 기호음료의 측면으로 한층 각광을 받게 된다. 특히 차에 함유된 여러 성분들이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소개되고 또 이같은 내용이 논문 등으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우리의 음다 풍습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에서 열거한 것처럼 근대 이후 현대 우리 차문화의 실제는 그 흐름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모로오카와 이에이리는 『조선의 차와 선』에서 근대 이후 우리나라 차문화 쇠퇴의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 첫번째가 한국의 차문화는 사원(寺院)을 중심으로 전래되어 조선조 불교의 쇠퇴와 함께 음다 풍속도 쇠퇴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연초(煙草)와 술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끽연량의 증가 추세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호성이 떨어지는 차의 소비가 줄어들게 되었으며, 각종 제례의식 등에 차 대신 구입이 쉬운 술을 사용하고 즐겨 마셨기 때문에 차문화가 쇠퇴했다는 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한국의 수질(水質)이 좋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차 소비가 많은 나라인 중국의 경우 수질이 좋지 않기로 유명하다. 중국 국민들의 대표적인 식수원인 황하강(黃河江)의 이름이 황토를 대량으로 운반하여 탁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니 이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섬나라인 일본은 항상 짠 염분에 식수가 노출돼 있어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저자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를 지은 이능화(李能和)가 "선인들이 차를 마시지 않는 것은 물이 좋기 때문이었다"는 문구를 인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따른 반론도 만만찮다. 『조선의 차와 선』을 번역했던 김명배(金明培)는 해제(解題)를 통해 이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그는 ""사원차설(寺院茶說)"은, 사찰을 차의 생산공급처로 보고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불교 사원이 쇠퇴하여 차 풍습도 덩달아 쇠퇴했다는 주장이지만, 이는 공양용이며, 백성들의 차 소비는 경상도 세 군데, 전라도 열여덟 군데에 있던 다소(茶所)에서 생산된 물량으로 가능했으며 유교에서도 다례가 행해져, 이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역설하고 있다. 또 조선의 수질이 좋아 차문화가 쇠퇴했다는 것과 관련해 "차문화가 번성했던 신라와 고려에서도 수질은 좋았다"며 "조선시대 사람들도 끽연과 음주의 해악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문화가 오히려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의 진위 여부는 앞에서도 누차 설명한 것과 같이 어느 주장이 옳고 틀리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오늘날의 한국 차문화는 여러 단체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서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19세기말에는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다업(茶業) 진흥을 건의하기도 했다. 1883년부터 농상사(農商司)에서는 차의 재배를 관장하고 차 재배를 위한 조사를 지시했으며, 1885년에는 청(淸)나라로부터 차나무 모종 육천 그루를 수입하기도 했다.

1885년에 안종수(安宗洙)가 쓴 『농정신편(農政新篇)』에는 차의 재배에 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한말에는 고관들 사이에 "다화회(茶話會)"라는 모임이 자주 열렸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차의 생산과 보급 등 우리 차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물론 그 목적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한 방편이었다. 광주에 "무등다원(無等茶園)", 정읍에 "소천다원(小川茶園)", 보성에 "보성다원(寶城茶園)" 등이 조성된 것도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1930년대부터 여자고등학교와 여자전문학교에서 "다도(茶道)"가 교육되었는데, 1940년대에는 마흔일곱 개 여자고등학교와 상당수의 여자전문학교에서 교습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다도 교육은 순수한 예절 교육의 차원을 벗어나, 일본의 다도를 우리나라에 옮기려는 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1960년대 이후 새롭게 일기 시작한 차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 후반부터 활기를 띠었다.

또한 1980년대 이후 국내에는 많은 차문화 관련 단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육이오 전쟁 때 사용되었던 군수물자 및 유엔 가맹국들의 원조물품 속에 끼여 있다가 우리 국민들의 생활 속에서 흡수되어 버린 커피와 코코아의 음용 습관을 바꿔 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과정에서 1979년 1월 "한국차인회(韓國茶人會)"가 창립되었으며, 다음해인 1980년 4월 해남 일지암(一枝庵) 복원을 위한 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이어 1981년 「한국 차문화 자료전」이 한국차문화협회와 가천문화재단의 전신인 숭례원(崇禮院), 그리고 케이비에스 공동주최로 서울에서 대대적으로 개최되었다. 그 여파를 몰아 전국의 차인들은 1981년 5월 "차의 날"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전국 차인들의 열화와 같은 차문화 발전에 대한 일치된 힘은 당장 정부를 움직이는 힘이 됐다. 문화관광부의 전신인 문화공보부는 1983년초 전통차 보급계획을 발표한다. 당시의 발표내용을 보면, "팔육 아시안게임 및 팔팔 서울 올림픽에 대비하여 전통생활과 문화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전통차 및 다도를 개발 보급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국민정신 순화와 주체의식을 고취하고 대외적으로는 우리의 것을 선양하는 데 기여하기 위함"이라는 목적 아래 전통 차의 현황.필요성.보급계획, 그리고 각 기관의 협조사항 등 네 개 문항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계획서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차의 전래 시기를 신라 흥덕왕 때로 잡고 있으며, 1980년대에 차 보급이 대중화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대량생산 보급체제의 미흡함과, 차와 다기(茶器)가 값비쌌던 점, 그리고 커피 등 외래 음료의 범람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차 보급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전통 차문화의 생활화를 통해 주체의식을 함양하고 이를 유지해 우리의 것을 찾고 가꾸는 의식을 고취시키며, 전통 차문화(음미.사색)를 통해 국민정신 순화와 예의, 질서 존중의 정신을 고양시킨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약리적 효과로는 수면.권태.해갈의 해소 등에 효과가 있어 국민건강 관리에 기여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이 계획서에서는 팔육 아시안게임, 팔팔 서울 올림픽에 대비하여 전통 가정생활 문화로 개발하면서 외빈 접대용 차로 이용하며, 품질이 우수하여 수출대상 품목으로 개발할 여지가 많으며, 경제적 수익으로는 커피.홍차와 같은 서양 차의 수입을 줄임으로써 외화절약에도 기할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